언론

2017-02-28 10:45:46

공정무역, 런던의 명품브랜드

지구를 바꾸는 행복한 상상 ‘Why Not’

공정무역, 런던의 ‘명품 브랜드’


많이 파니까 사게 되고, 사다 보니 알게 되고, 알고 보니 또 사는 긍정적인 소비 순환 구조


수업 시간 중간 출출함을 달래려고 학교 매점에서 오렌지주스와 초콜릿 크리스피바를 샀다. 2파운드(약 4천원). 점심을 먹고 친구와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콜라와 카푸치노 커피를 마셨다. 2.2파운드. 옥스퍼드 스트리트의 ‘막스앤드스펜서’ 매장에서 흰색 면 티셔츠를 샀다. 5파운드. 집에 오는 길에 대형 매장 ‘세인스베리’에 들러 바나나와 포도를 샀다. 3.88파운드. 지난 며칠간의 내 지출 내역이다. 총 13파운드. 상품 종류도 다르고 제조사도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제품 겉에 부착된 ‘공정무역’(FairTrade) 마크. 영국 런던에서 공부하고 있는 평범한 한국 유학생인 내가 이렇게 많은 공정무역 제품을 산 이유는 뭘까. 유난히 제3세계 공정무역 제품에 관심이 많은 윤리적 소비자라서? 눈에 불을 켜고 발품을 팔며 공정무역 제품을 찾아다녀서? 아니다. 많이 팔기 때문이다. 많이 파니까 손에 잡히는 물건이 공정무역 제품이다.

영국 런던의 한 대형마트에서 한 런더너(Londoner)가 한 바구니 가득 공정무역 제품을 채운 뒤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런던에서는 공정무역 제품을 피하기가 더 힘들 정도로 공정무역 제품 판매가 활성화돼 있다. 소비자도 구매에 적극적이다. 영국 공정무역재단 제공

세계에서 가장 큰 공정무역 도시

내가 다니는 런던대 골드스미스 칼리지 카페테리아에서 판매되는 모든 커피와 차는 공정무역 제품이다. 학교 매점에도 공정무역 과자와 초콜릿 등을 파는 코너가 따로 있다. 집 근처의 대형마트 세인스베리에는 바나나와 오렌지, 귤, 포도 등 과일부터 와인까지 주요 농산품 수십 가지를 공정무역 제품으로 판다. 경쟁사인 테스코와 아스다도 마찬가지다. 모든 영국인의 ‘마음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막스앤드스펜서에는 화장솜부터 수건, 베개 커버, 아기 용품까지 공정무역 면으로 만든 제품이 ‘착한’ 가격으로 판매된다. 공정무역 제품은 촌스러울 것 같다는 편견이 있으신가? 버리시라. 영국 젊은이의 놀이터인 의류 매장 ‘톱숍’에는 세련된 공정무역 티셔츠와 레깅스, 스카프가 진열돼 있다. 자꾸만 지갑에 손이 가게 만드는 패션 브랜드 ‘액세서라이즈’의 멋스러운 천 가방 역시 공정무역 면으로 만든 제품이다. 동네 버스 정류장 근처의 작은 가게 유리창에도 공정무역 제품이 캠페인 포스터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많이 파니까 사게 되고, 사다 보니 알게 되고, 알고 보니 또 사게 된다. 공정무역 제품의 이런 긍정적인 소비 순환 구조가 가능한 곳이 런던이다.


런던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공정무역 도시다. 지난해 10월 영국 공정무역재단은 런던을 ‘공정무역 도시’(Fairtrade City)로 선포했다. ‘공정무역 도시’ 자격을 얻으려면 다섯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해당 지역 의회가 공정무역 관련 결의문을 통과시켜야 하고, 인구 대비 공정무역 판매 매장 수도 일정 수를 넘어야 한다. 세계적으로 공정무역 도시 자격을 얻은 도시나 지역은 500곳이 넘는다. 영국 카디프·더블린·에든버러, 미국 샌프란시스코 등 대도시부터 인구 60명의 영국 소도시 스코틀랜드 페어섬까지. 런던은 이 500여 개의 공정무역 도시 중 가장 규모가 큰 곳이다. 2003년 런던의 크로이든구가 첫 번째 공정무역 지역으로 선정된 이래, 시 전체가 5년 동안 공정무역 도시를 향해 뛰어온 결과 거둔 의미 있는 수확이다. 보리스 존슨 런던시장은 “런던 시민은 자신이 구입하는 제품이 공정무역을 통해 거래된 제품이기를, 그래서 개발도상국의 농부와 노동자의 삶에 의미 있는 변화가 있기를 바란다는 명확한 메시지”라고 밝혔다.


런던의 학교, 공공기관, 관공서의 매점 그리고 곳곳의 슈퍼마켓에서 만날 수 있는 공정무역 제품들. 보편화된 커피와 초콜릿부터 주스, 콜라, 사탕, 옷, 가방까지 공정무역 제품은 날로 늘어나고 있다. 사진 한겨레 안인용 기자


영국 공정무역재단에 따르면, 런던에는 공정무역 제품을 판매하는 매장이 약 1천 개, 음식점이 약 600개가 있다. 몇 군데 소개해보자. 런던 방문객이라면 한 번쯤은 가볼 만한 바비칸 문화센터와 트래펄가 광장의 카페가 있고, 런던 아이나 국립극장 카페에서도 공정무역 제품을 살 수 있다. 킹스칼리지나 런던정경대학 등 교육기관 매점에서도, 런던경찰청·영국중앙은행(BOE)·BBC 방송사 등 공공기관 매점에서도 공정무역 제품을 주로 취급한다.


런던을 중심으로 한 영국 전역의 공정무역 열기는 최근 몇 년 동안 전세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영국 공정무역재단에 따르면, 영국 소매점 판매 기준 공정무역 제품 매출은 1998년 1670만파운드에서 2003년 9230만파운드, 2005년 1억9500만파운드를 기록하며 7년 동안 10배가 넘는 성장률을 보였다. 공정무역 열기가 뜨거워지기 시작한 2006년에는 2억869만파운드를, 2007년에는 전년 대비 72%가 오른 4억930만파운드를 기록했다. 2006년과 2007년 사이에 기록한 72%라는 수치는 영국과 함께 세계 공정무역 시장을 이끌어가는 미국의 성장률인 46%보다 훨씬 높다. 매년 놀라운 성장률을 보이고 있는 영국의 공정무역 시장은 16억파운드(2007년 기준)인 세계 공정무역 제품 매출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커피와 바나나가 매년 변치 않는 주요 공정무역 제품 1·2위로 손꼽히고 있기는 하지만 가장 큰 폭으로 커지고 있는 제품은 면이다. 2005년 처음 들어온 공정무역 면 제품은 3년 만에 20만파운드에서 3480만파운드로 대폭 성장했다.


영국 공정무역 시장은 윤리적 소비에 대한 영국인의 의식 변화를 원동력으로 성장했다. 지난 2월9일 런던 뉴크로스 게이트에 있는 대형 마트 세인스베리의 과일 코너에서 만난 현지인 마크 스위니(32). 두 종류의 포도를 놓고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한 손에 든 일반 포도는 500g에 2.49파운드, 맞은편 손에 든 공정무역 포도는 같은 양에 2.69파운드로 20펜스(400원) 차이. 결국 그의 바구니에는 20펜스 비싼 공정무역 포도가 ‘골인’했다. 스위니는 “공정무역 제품이라는 건 내가 지불한 돈이 이 포도를 제배한 사람에게 제대로 전달되고 그 과정이 투명하다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비슷한 품질의 제품일 때 20펜스가 비싼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몇 년 전만 해도 공정무역 제품인지 아닌지가 중요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꽤 중요한 기준이 됐다”며 “물건을 살 때 고민할 거리가 한 가지 더 늘었지만 오히려 기분이 좋다”고 덧붙였다. 영국 공정무역재단은 지난해 영국인 중 70%가 공정무역 마크에 대해 인식하고 있고, 64%가 공정무역 마크와 개발도상국의 생산자에게 더 나은 이익을 돌려준다는 공정무역의 개념을 연결시키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70%가 공정무역 마크에 대해 인식

공정무역은 마케팅 분야에서도 힘이 세졌다. 공정무역 마크가 제품의 브랜드 로고에 못지않은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대기업의 참여도가 점차 높아졌다. 영국 내 공정무역 제품의 급격한 증가는 수많은 매장을 가진 대기업 없이는 설명이 힘들다. 소비자의 의식이 변하면서 ‘윤리적인 기업’이란 말은 기업 이미지 광고에나 쓰이는 문구를 넘어 소비자의 구매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됐다. 실제로 식음료 분야 연구기업 ‘IGD’가 지난해 12월 실시한 설문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25%가 지난달에 공정무역 제품을 구매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경제위기로 인한 소비 위축에도 불구하고 공정무역 식품과 지역 생산 식품 등 윤리적 식품 소비는 오히려 늘었다. 매출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를 따져봐도, 대세인 공정무역을 따르는 기업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공정무역의 대표 품목인 커피. 커피의 대표적인 브랜드 스타벅스도 영국에서는 대세에 따르겠다고 발표했다. 스타벅스는 지난해 11월 영국과 아일랜드의 모든 스타벅스 매장에서 판매하는 원두와 에스프레소가 들어가는 커피 제품에 공정무역 커피 사용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6%에 불과한 영국 내 스타벅스의 공정무역 커피 사용 비율을 올해 말까지 100%로 늘린다는 얘기다. 이는 앞으로 스타벅스가 세계적으로 공정무역 커피의 최대 구매자가 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영국·아일랜드 스타벅스의 다시 윌슨 라이머 사장은 “영국 소비자는 윤리적 문제에서 의식도가 높고 특히 제품의 원료와 관련된 문제에 관심이 많다”며 “100% 공정무역 커피 사용이 제3세계 지역에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스타벅스의 진정한 약속임을 영국을 비롯한 전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사용한 만큼 지불한다’는 간단한 명제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공정무역 제품이 있는 영국, 세계의 공정무역 흐름을 주도하는 도시 런던. 경제위기라는 한파에도 영국과 런던의 공정무역 제품 소비가 줄지 않는다는 것은 소비의 기준이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다는 방증이다. 공정하지 못했던 무역이 경제위기라는 숙제와 함께 남겨준 간단한 교훈을, 그러니까 ‘1+1=2’만큼이나 간단한 ‘사용하는 만큼 지불한다’는 명제를 가장 먼저 알아챈 이들이 영국 소비자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영국에서 윤리적인 소비는 현실이다.


런던(영국)=안인용 기자 한겨레 ESC팀 nico@hani.co.kr 

원문 출처: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4384.html